소치 올림픽 피겨 경기에서 러시아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국 선수들에게 메달을 만들어주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단체전, 아이스댄스, 페어 모두 그러했다. 남자 싱글은 플루셴코의 기권으로 무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여자 피겨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누군가가 김연아가 쇼트와 프리를 모두 클린해도 러시아의 신예 선수에게 밀릴 수 있다고 말하면 피겨를 아는 사람들은 아마 피해 망상이 심하다고 비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불쾌하다. 그러나 2008년 세계선수권 때처럼 밤잠을 설칠 정도는 아니다. 연아에게 이미 금메달이 있어서일수도, 연아가 아름다운 클린 연기를 선물해 주어서일수도 있지만, 긴말 할 필요 없는 오심이라서인 것 같기도 하다.
올림픽 2연패라는 타이틀은 획득하지 못했지만, 김연아가 엄청나게 강한 선수라는 것은 명백해졌다. 긴 공백 끝에 돌아와 모두의 의심을 불식시키며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따냈고, 출전한 두 번의 올림픽에서 엄청난 압박감을 딛고 쇼트와 프리 모두 실수 없는 연기를 해냈다. 밴쿠버 올림픽 이후 여자 싱글을 포함한 모든 피겨 종목에서 점수 인플레이션이 있었고 그 결과 다른 모든 종목에서는 신기록이 뒤바뀌었지만, 여자 싱글에서 김연아가 세운 두 개의 기록만은 깨지지 않았다. 출전한 전 대회 메달권 입상이라는 그녀 자신의 기록 역시 지켜냈다.
연아의 복귀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녀가 더 이상 트리플-트리플을 뛰지 못하고 더 이상 이른바 '탑 여싱'이 아니더라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2012년 NRW 트로피에 등장한 그녀를 보고 내가 그녀를 정말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 최초 주니어 그랑프리 금메달, 주니어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시작으로 2006년 그랑프리 시리즈에서의 화려한 시니어 데뷔, 피겨 역사상 영원히 남을 2007년 도쿄의 록산느의 탱고를 거쳐, 자신이 세운 신기록을 매년 스스로 경신하며 마침내 2009년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다음 해에 모든 경쟁자를 압도하며 올림픽 챔피언이 되었던, 그녀의 첫번째 여정도 눈부시게 찬란했지만,
긴 고민 끝에 돌아와 2013년 세계선수권에서 자신이 아직 여자 피겨스케이팅의 정상에 있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생애 두 번째 올림픽에서도 실수 없는 두 개의 아름다운 프로그램을 선사해 주었던 두 번째 여정 역시 그 못지 않게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여정을 올림픽 금메달로 장식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금메달이 있어도 없어도 똑같이 아름답다.
나는 김연아의 여정 전체에 만족한다. 그것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러나 편파판정에는 화를 내겠다. 불의를 보면 분노하는 것이 당연하다.
저 빙판에 김연아의 imagine이 올라가리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 프로그램 구성 운운하는 것은 피겨를 모르는 사람들을 낚아보려는 수작인가? 기술 구성의 기초점이 높으니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게 정당하다면, 쇼트에서 아델리나보다 기초점이 높은 김연아가 더 높은 기술점을 받았어야 했고, 프리에서는 아델리나보다 많은 여덟 개 트리플을 넣어 온 아사다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어야 했던 것 아닌가? 아델리나의 점수는 프로그램 난이도가 높아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러시아 선수에게만 어처구니없이 후했던 가산점과, 그녀의 거친 스케이팅에는 터무니없이 과분하게 매겨진 PCS로 만들어진 것이다.
- 소트니코바에 묻혀서 눈에 띄지 않지만, 큰 실수를 세 번이나 저지른 율리아 리프니츠카야가 200점을 넘기며 5위에 랭크된 것도 코메디다. 그녀가 제 밥상을 걷어차지 않았다면, 시상대 세 자리 중 두 자리가 러시아 것이 되었겠지.
- 아사다 마오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안 든다. 다음 세계선수권이 일본이니, 자국에서 강한 그녀답게 화려하게 은퇴할 수 있겠지.
- 이럴 거면서 파렴치하게도 연아를 올림픽 홍보에 이용해먹었다니.
팬이 되기로 결심한 2006년부터 지금까지, 피겨라는 아름다운 스포츠를 제게 알려주어서,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연기를 볼 수 있게 해 주어서, 울고 웃게 해 주어서, 감동을 주고 용기를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연아선수.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행복하세요. 앞으로도 저는 당신의 팬입니다.